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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묘조 병술년(1586년)에 호란(胡亂)이 바야흐로 크게 일어나매, 조정에서 공을 천거하여 조산만호(造山萬戶)를 임명하고, 이듬해 정해년(1587년)에 녹둔도(鹿屯島) 둔전관(屯田官)을 겸임한지라. 이순신이 그 섬의 지형을 자세히 살피고 병사 이일(李鎰)에게 자주 보고하여 가로되, “섬은 외롭고 지키는 군사는 적으니, 만일 오랑캐가 오면 장차 어찌하리요?” 하되, 이일이 듣지 아니하여 가로되, “태평 시대에 군병을 더 설시하여 무엇하리요?” 하더니 오래지 아니하여서 변방 오랑캐가 과연 군병을 대기하여 그 섬을 둘러싸거늘, 이순신이 적의 장수 몇 사람을 쏘아 죽이고 이운룡(李雲龍) 등으로 더불어 추격하여 포로병(사로잡힌 군사) 60여 명을 도로 빼앗아올새, 한참 골똘히 싸우는 중에 오랑캐의 살에 맞아 왼 다리가 상하였으되, 군사들이 놀랠까 염려하여 몰래 빼어 버렸더라. 이것은 비록 작은 싸움이나 그 선견지명이나 기력의 건장할 것을 가히 알것이니 또한 이순신 역사의 한 조그만 기념이로다. 용이 진흙에 묻혀 있어서, 개미에게 곤핍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
저 이일이란 자도 또한 공의 공로를 시기하던 김우서의 변화한 후신이던지, 그 공로를 상줄 생각이 아주 없을 뿐더러 그 군병을 더 설시하자 하는 것을 자기가 듣지 아니하였음으로 부끄러워서 이순신을 죽이고자 하더라. 이순신이 이일의 부름을 듣고 장차 들어가려 할새, 그 친구 선거이(宣居怡)가 손을 잡고 눈물을 흐리며 술을 권하여 가로되, “술을 취하면 형벌 받을 때에 아픈 것을 모른다.” 하거늘 이순신이 정색하고 대답하여 가로되,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니 술은 먹어 무엇하리요?” 하고, 드디어 들어간즉 이일이 패전하였다는 글을 써서 바치라고 꾸짖으며, 위협하는지라. 이순신이 가로되, “내가 군병을 더 설시하자고 여러 번 청하였으되, 허락하지 아니한 서목(書目)이 내게 소상이 있거늘 어찌 나를 죄주며, 또 내가 힘써 싸워 도적을 물리치고 포로병을 도로 빼앗아 왔거늘 어찌 패전하였다 하리요?” 하고 소리와 안색이 다 씩씩하매, 이일이 말이 막히어 능히 다시 힐난하지 못하였으나 마침내 조정에 무고하여 삭탈관직하고 백의로 종군하게 하니라. 재주가 있으면 시기를 받고, 공로가 있으면 죄를 받으니, 그때의 일을 가히 알지로다. 그러나 문충공(文忠公) 유성룡이 공의 재주를 깊이 탄복하여 무관 중에는 불차택용 할 인재라고 자주 천거하더라. 선묘조 무자년(1588)에 정읍현감(井邑縣監)을 제수하고, 태인현감(泰仁縣監)으로 겸관이 되었더니, 그때에 태인 고을이 오래 공관이 되었는지라, 그 적체한 문부를 경각에 다 처결하니, 온 고을 사람이 다 놀라서 어사(御使)에게 정문(呈文)을 드려 이순신을 태인현감에 임명하여 달라고 청하는 자분분하였으니, 오호라! 범 같은 장수의 지략으로서 목민지관의 재목도 겸비하였도다. 경인년(1590년)에 고사리(高沙里) 첨사로 제수되더니 수령을 천동한다고 대간이 일어나서 막게 되어 인임하였다가 오래지 않아서 만포 첨사(萬浦僉事)로 제수되더니 속히 승차된다고 대간이 또 일어나서 막으매 다시 인임이 되었더니, 이듬해 신묘에 왜구의 소식이 날로 굉장하매, 이에 비로소 대장 재목을 구하니 이순신의 성공할 날이 점점 가까웠도다.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서임하였다가, 미처 부임치 못하여서 가리포진 수군절제사(加里浦鎭水軍節制使)로 서임하고, 또 미처 부임치 못하여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를 서임하니, 그때에 나이 47세이러라. 이것은 이순신이 해상에 발을 붙이던 시초이니 영웅이 이제야 무예의 쓸곳을 얻었도다.